130개의 링크
언젠가부터 웹을 돌아다니다 좋아 보이는 디지털 아카이브를 만나면 Are.na1 채널에 모아두는 습관이 생겼다. 어디서 발견했는지, 왜 흥미로웠는지는 굳이 적어두지 않는다. 그냥 딸깍2 저장한다. 일주일에 몇 개씩, meta-archive 채널이 두꺼워진다.
채널을 만들 때부터 예감했다. 언젠가는 이들을 분류해야 한다. 다만 지금은 아니다. 아이템이 충분히 모이지 않은 상태에서 분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물에서 출발해 패턴을 찾고 그 패턴에 이름을 붙이는 귀납적 분류는, 충분한 누적 없이는 시작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일단 모았다. 분류는 처음부터 예정된 수순이었지만, 동시에 유보된 일이었다.
지금 이 채널에는 130개가 넘는 디지털 아카이브 링크가 쌓여 있다. UbuWeb, Europeana, 퀴어락, 지암일기, Cameron's World, Low-Tech Magazine, Takachizu… 이제 시작해도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시작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시작하기 전에 이미 어긋나는 지점들이 떠올랐다.
주제로 나누면 어떨까. 퀴어, 건축, 음악, 민속, 기후. 첫 시도부터 멈칫한다. 퀴어락3은 퀴어 아카이브인가, 한국 시민단체의 아카이브인가, Omeka4 기반의 아카이브인가. 어느 한 칸에 넣는 순간 나머지가 보이지 않게 된다. 운영 주체는 어떤가. 공공기관, 시민단체, 개인. 개인이 만들었지만 기관처럼 작동하는 것들이 있고, 기관이 운영하지만 개인 작업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경계는 자꾸 흐려진다. 기술 프레임워크라면. Omeka, 워드프레스, 커스텀. 분류는 깔끔할 테지만, 같은 Omeka 위에 무엇이 올라가 있는가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프레임워크로 나누는 순간 정작 중요한 것이 사라진다.
분류를 시도하기도 전에 분류는 흔들렸다. 어쩌면 이건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디지털 아카이브를 분류할 수 있을 만큼 아직 알지 못한다는 신호다.
알면 나눈다
분류(classification)는 지식의 결과처럼 보인다. 어떤 영역을 충분히 알게 되면 그 영역을 나눌 수 있고, 잘 나눠 보여주는 것은 지식이 완성되었다는 증거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분류는 앎이 도착한 자리,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자리로 여겨진다.
그러나 실은 정반대다. 분류는 지식의 도착이 아니라 지식의 시험이다. 정보학자 사이토 다카시는 이를 단호하게 말한다. 분류는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만든다.5 무엇을 한 칸에 넣고 무엇을 다른 칸에 넣을지 결정하는 순간, 우리는 세계의 한 구조를 생산한다. 그 생산된 구조가 곧 지식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잘 알수록 더 잘 나눈다. 한 범주가 모호해지면 더 세분화한다. 다시 모호해지면, 다시 나눈다. 분류 능력의 끊임없는 정교화가 곧 지식의 운동이다. 반대로, 어떤 영역을 정말 모를 때 우리는 분류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하나로 뭉쳐 있고,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알면 나눈다'. 나누지 못하면, 아직 모르는 것이다.
'알면 나눈다'. 이 문장은 이중적이다. 나눈다는 분류한다는 뜻이고, 동시에 공유한다는 뜻이다. 안다는 것은 결국 나의 언어로 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고, 재구성된 세계는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형태가 된다. 혼자만의 분류는 사적인 인식이지만, 전달되는 분류는 공적인 지식이 된다. 분류와 소통은 같은 뿌리에서 자란다.
위에서 내려오는 분류
그러나 분류가 늘 앎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만들어져 내려오는 분류가 있다. 사물이 도착하기도 전에 자리는 정해져 있고, 사물은 그 자리에 맞추어 들어가야 한다.
도서관이 그렇다. 한국십진분류법(KDC)6에 따르면 컴퓨터과학은 000 총류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듀이가 1876년에 분류 체계를 만들었을 때, 컴퓨터과학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가 세계를 잘못 본 것이 아니라, 그가 본 세계가 그 세계였다. 그런데 그 분류가 백 년이 지나도 살아남으면서, 과거의 세계가 현재의 책을 강제로 받아들이는 사태가 벌어진다. 컴퓨터과학은 사회과학도 자연과학도 아닌 '총류'의 좁은 자리에 끼워 넣어졌다. 그리고 한국의 거의 모든 도서관은 그 자리를 받아들였다.
기록관리도 비슷하다. 한국의 모든 공공기관은 정부가 표준으로 정한 정부 기능 분류 체계(BRM)7에 자신의 업무를 대응시켜야 한다. 분류는 업무 시작 전에 이미 표준으로 존재하고, 기관은 자기 일을 그 표에 맞춰 번역한다. 업무가 변하면 분류도 변해야 하지만, 분류는 늦게 변한다. 새로 생긴 업무는 옛 분류 안에 욱여넣어진다.
이 모든 분류는 완성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 한 번 표준이 되면 잘 바꾸지 않는다. 물질적 조건도 거기에 맞물려 있다. 도서관 서가의 분류를 바꾸려면 책을 꺼내서 새 번호를 붙이고 다시 꽂아야 한다. 분류 체계의 일부만 손대도 거대한 노동이 발생한다. 그래서 분류는 세계가 변해도 좀처럼 따라 변하지 못한다. 시간 앞에서 분류는 점점 어긋난다.
그릇이 만들어지는 시간
위에서 내려온 분류가 시간 앞에서 어긋난다면, 그 반대 방향의 길도 있다. 사물이 먼저 있고, 시간이 흐르면서 분류가 만들어지는 길. 수집과 분류 사이에 놓인 시간이다.
처음에는 딸깍 하고 모은다. 그럴듯해 보이는 것, 비평하면 재미있을 것 같은 것. 일단 저장해둔다. 한 번에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중에 다시 본다. 두 번째 보기에서 무언가가 시작된다. 이것은 저것과 비슷하다. 이것은 저것과 다르다. 비교가 시작된다. 비교는 분류보다 약하지만 더 일찍 일어나는 일이다. 비교가 충분히 쌓이면 패턴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이름 없는 패턴이다. "뭔가 비슷한데 뭐가 비슷한지 모르겠다"는 상태가 한동안 지속된다.
이 시간이 결정적이다. 신경과학에서는 이를 범주적 지각(categorical perception)8이라 부른다. 뇌가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개념의 그릇을 마련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신호가 들어와도, 그것을 담을 그릇이 없으면 경험이 되지 않는다. 어떤 영역에 그릇이 많은 사람은 그 영역의 작은 차이도 잡아낸다. 그릇이 없는 사람에게는 같은 신호가 그저 노이즈로 흘러간다.
130개의 아카이브가 내 안에 누적되면서, 나는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 더 정확히 말하면, 수집한 것이 수집한 사람을 만든다. 수집은 내가 사물에 가하는 행위지만, 그 사이의 시간에서는 사물이 나를 만든다. 분류할 수 있는 능력이 그렇게 길러진다.
분류가 무한히 펼쳐지는 분류
이 시간을 우회하는 분류도 있다.
폭소노미(folksonomy)9는 분류의 권한을 사용자에게 위임한다. 누구나 태그를 붙일 수 있다. 태그는 무한히 늘어난다. 분류는 누가 미리 만들어두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쓰는 단어들이 모여 만들어진다. 민주적으로 보이고, 유연해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방식으로 무언가 어긋난다. 분류의 책임이 사라진다. 분류가 기술(description)이 되는 순간, 분류는 구성(construction)하는 힘을 잃는다. 누구도 세계를 만들지 않는다는 건, 세계가 저절로 만들어진다는 착각을 남긴다. 태그가 무한히 쌓이면 분류가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태그들의 집합이 세계에 대한 이해를 구성하는가는 다른 문제다.
실무에서도 같은 어긋남이 나타난다. 폭소노미는 사용자가 작성한 단어를 그대로 분류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용어의 통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같은 개념을 가리키는 태그라도 표기가 조금이라도 다르면—띄어쓰기, 단·복수, 외래어 표기의 차이—시스템은 그것들을 다른 것으로 처리한다. 같은 것을 가리키는 태그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용어가 남발되며, 개념은 흩어진다. 무한히 늘어나는 태그는 결국 무엇 하나 정확히 가리키지 못하는 상태로 귀결되기도 한다.
위에서 내려오는 KDC와, 어디서도 내려오지 않는 폭소노미는 양 극단에 있다. 한쪽은 과거의 세계가 현재를 강제하고, 다른 쪽은 현재의 무게를 누구도 지지 않는다.
다시 쓰는 분류
수집과 분류 사이에 머무는 일은 이 두 극단 사이에 있다. 미리 정해진 분류도 아니고, 무한한 태그도 아니다. 모으고, 들여다보고, 비교하고, 패턴을 발견하고, 이름을 시도하고, 다시 바꾸는 과정. 다시 쓰는 분류.
이게 가능한 것은 웹이기 때문이다. 도서관 서가의 분류를 바꾸려면 책을 옮겨야 한다. KDC를 다시 짜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린다. 그러나 웹에서 카테고리를 다시 쓰는 데는 며칠이면 충분하다. 이 유연성은 단순한 기술적 편의가 아니다. 분류를 과정으로 다룰 수 있는 매체적 조건이다. 어쩌면 웹이 등장하기 전까지, 분류는 좀처럼 살아 있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무거웠다.
다시 쓰는 분류는 끝나지 않는다. 더 많은 아카이브를 보고, 더 많이 어긋나면서 분류는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어제의 분류가 오늘 틀렸다면, 고치면 된다. 그리고 그 변화의 흔적도 기록이다. 분류표만이 아니라 분류표의 역사가 함께 남는다.
분류의 시간
모든 분류는 자신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그 시간은 끝난다.
KDC가 컴퓨터과학을 작은 구석에 둔 것은 결함이 아니다. 시간이다. 1876년의 세계 이해가 백 년 뒤의 세계와 어긋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분류는 한 시점의 인식을 고정한 것이고, 시간은 그 고정을 계속 흔든다. 분류는 항상 실패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새로운 사물이 나타나고, 기존의 사물이 다르게 보이고, 세계가 분류보다 빠르게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실패는 무의미하지 않다. 실패가 다음 분류를 부른다. 분류가 어긋난 지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모르고 있었는지를 본다. 그 자리에 새로운 그릇이 생긴다. 그렇게 보면 분류의 힘은 그것이 무엇을 한 번에 정리해냈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다음 분류를 가능하게 했는가에 있다. 분류는 끝점이 아니라 운동(movement)이다.
분류는 세계에 대한 가설이다. 모든 가설은 언젠가 반증된다. 그러나 가설 없이는 세계가 보이지 않는다. 분류를 멈추는 순간, 세계도 멈춘 척한다. 우리가 계속 다시 나누는 것은 세계가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고, 동시에 그 멈추지 않는 세계를 우리의 언어 안으로 다시 끌어들이려는 일이다.
수집과 분류 사이에 머문다는 것은 이 운동(movement)에 머문다는 것이다. 그릇이 만들어지고, 깨지고, 다시 만들어진다. 하나의 분류는 시간을 다하면 끝나지만, 분류는 끝나지 않는다.
주석
- Are.na는 2014년 설립된 콘텐츠 큐레이션 플랫폼이다. 사용자가 블록(block)—이미지, 텍스트, 링크, 파일—을 채널(channel)에 모으고, 채널끼리 연결하며 자기만의 지식 그래프를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추천 알고리즘과 광고가 없고, 디자이너·연구자·예술가들의 서랍이자 공동 작업 공간으로 쓰인다. 모은 콘텐츠는 공개 API로도 접근할 수 있다. ↩
- 여기서 딸깍은 Are.na의 브라우저 익스텐션을 가리킨다. 크롬·파이어폭스용 공식 익스텐션으로,
are.na/install에서 설치할 수 있다. 웹페이지를 보다가 익스텐션 아이콘을 누르면 현재 페이지의 제목·URL·대표 이미지가 채널에 즉시 저장되고, 본문의 일부 텍스트나 특정 이미지만 골라 우클릭으로 보낼 수도 있다. 단축키는Option+A. 한 페이지를 채널로 옮기는 데 드는 시간은 1~2초 정도다. 딸깍은 그 가벼움의 의성어다. ↩ - 퀴어락(한국퀴어아카이브, Korea Queer Archive)은 한국 성적소수자의 역사적·문화적·사회적 기록을 수집·정리하여 공유하는 아카이브로,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가 기획·운영한다. Queerarch를 발음대로 읽은 이름이자, 한자 '즐거운 樂'의 의미를 담아 퀴어의 즐거움이 되는 아카이브가 되겠다는 의지를 담은 애칭이다. 2009년 오픈했다. ↩
- Omeka는 도서관·박물관·아카이브 분야의 디지털 컬렉션 구축을 위한 오픈소스 콘텐츠 관리 시스템이다. 2008년 미국 George Mason University의 Roy Rosenzweig Center for History and New Media에서 개발되어 공개되었다. Dublin Core 등 표준 메타데이터 스키마를 기본으로 지원하며, 시민 아카이브, 디지털 인문학 프로젝트, 소규모 박물관 등에서 널리 쓰인다. 본격적인 기관 운영용 Omeka S와 소규모용 Omeka Classic 두 갈래로 발전했다. ↩
- 사이토 다카시, 『기록·정보·지식의 세계: 온톨로지 알고리즘 1』(최석두·한상길 옮김, 한울아카데미, 2020). 일본 문헌정보학 분야의 입문서로, 기록 → 정보 → 지식 → 분류 → 온톨로지의 순서로 지식이 어떻게 조직되는가를 다룬다. "분류는 세계를 만든다"는 명제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전제이며, 책의 4–5장(지식의 지식, 분류학과 분류 시스템)에서 직접적으로 다루어진다. ↩
- 한국십진분류법(Korean Decimal Classification, KDC). 1964년 한국도서관협회가 듀이십진분류법(DDC)을 참고하여 제정한 한국 표준 도서 분류 체계. 0(총류)–9(역사)로 이루어진 십진 구조이며, 컴퓨터과학은 004로 0(총류) 안에 위치한다. 듀이가 1876년에 만든 십진분류 구조를 한국 환경에 맞춰 번안한 만큼, 분류의 큰 골격은 19세기 후반의 학문 체계 인식을 그대로 따른다. ↩
- 정부 기능 분류 체계(Business Reference Model, BRM). 한국 공공기관의 업무와 기록을 통합 관리하기 위해 정부가 마련한 표준 업무 분류 체계. 정책 분야 → 정책 영역 → 대기능 → 중기능 → 소기능의 계층 구조를 갖는다. 각 기관은 자기 조직의 업무를 BRM의 표준 코드에 대응시키고, 이 분류를 기준으로 기록을 생산·관리한다. 업무가 변화해도 분류 체계의 큰 골격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
- 범주적 지각(categorical perception). 외부 신호의 연속적 차이를 뇌가 불연속적 범주로 받아들이는 현상. 동일한 물리적 차이라도, 한 범주 안에서는 거의 같게 들리고/보이며, 범주의 경계를 넘으면 크게 다르게 느껴진다. 1957년 음성학 실험에서 처음 보고된 이후, 색채 인지, 음악, 얼굴 인식, 전문가의 영역 지각 등으로 확장되어 연구되어 왔다. 어떤 영역의 전문가나 깊이 빠진 애호가는 일반인과 같은 자극을 받지만 다른 범주로 듣고 본다. 뇌과학자 장동선은 한 팟캐스트에서 이를 개념의 그릇이라는 비유로 풀어낸다. 뇌가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들어오는 신호를 담을 그릇을 마련하는 일이며, 그 그릇이 없으면 같은 신호도 노이즈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어떤 영역에서 그릇이 많은 사람—전문가든, 덕후든—은 같은 자극에서 훨씬 더 작은 차이를 듣고 본다. 그릇은 학습과 누적을 통해 만들어진다. 「덕후의 뇌 구조는 머글과 다를까?」 찐들의 페이지 스덕방 EP.15, 2026-05-22, 46:00~ 구간. ↩
- 폭소노미(folksonomy)는 folk(사람들) + taxonomy(분류)를 합쳐 만든 신조어다. 2004년 정보 아키텍트 Thomas Vander Wal이 del.icio.us, Flickr 같은 초기 소셜 북마크/태깅 서비스를 관찰하면서 처음 사용했다. 권위 있는 분류자(전문가, 사서, 큐레이터)가 아니라 사용자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태그를 다는 분산형 분류 방식을 가리킨다. ↩
관찰 메모
- 2026-05-28: Are.na meta-archive 채널의 분류 가능성을 검토하다가, 분류가 시도되기 전에 이미 어긋나는 지점들이 보인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초안 작성. 사이토 다카시의 온톨로지 알고리즘 1과 신경과학의 범주적 지각 개념을 참조함.
레퍼런스
- 사이토 다카시 (2020). 『기록·정보·지식의 세계: 온톨로지 알고리즘 1』. 최석두·한상길 옮김, 한울아카데미. (교보문고)
- Bowker, G. C., & Star, S. L. (1999). Sorting Things Out: Classification and Its Consequences. MIT Press.
- Vander Wal, T. (2007). "Folksonomy Coinage and Definition."
- Harnad, S. (2003). "Categorical Perception." In Encyclopedia of Cognitive Science. Macmillan.
- 한국도서관협회 (2013). 『한국십진분류법 제6판』.
- 「덕후의 뇌 구조는 머글과 다를까?」 찐들의 페이지 스덕방 EP.15, 2026-05-22.
- 퀴어락 (Queer Archives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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